<History and the Bullet in the air>. 개인적으로 남길 단평이 많은, 10편의 소설 중 구성 면에서 가장 난해한 작품입니다. 겉보기로만 본다면 제가 본 동방 팬픽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작가님의 의도에 맞게 일단 따라가 보면서 모르는 채로 감상한 바를 그대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0) 양자 중첩 소설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추구할 법한 ‘입체적인 내용을 만든다’와 ‘곡해의 여지를 줄인다’가 과연 어디까지 달성 가능한 목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이란 기본적으로 다량의 정보를 순차적으로 전달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최소한 후자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죠.
정보가 순차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따라서 독자의 일차적인 해석이 부정당하게 되면 시선이 앞으로 돌아가고 선형성이 조금 낮아집니다. 예를 들자면 소설 속의 반전이 어리둥절한 독자의 눈길을 앞으로 잡아채는 효과를 볼 수 있겠습니다. 글에서 필요한 정보를 조금씩 풀거나 (지금처럼 나중에 돌아오란 이정표를 남길 때) 작품 곳곳에 산재된 퍼즐 조각을 맞춰야 할 시에도 비슷합니다. 이런 시도를 통해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작품이 입체적으로 변화하고, 글이란 매체 특유의 선형성도 극복할 수 있는 셈이죠.
다만 이런 비선형적인 구성은 필연적으로 난해함을 낳습니다. 어찌되었건, 이 글을 읽는 방법은 지그재그가 아니라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입니다. 작품이 난해한 이유도 한번 읽은 문장을 계속해서 읽어보거나 앞으로 돌아가게 하는 구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장면이 1) 다양한 시점을 한데 엮은 몽타주와 2) 텍스트적 연출, 의도적인 모호함, 3)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인용구입니다.
1.1) 인트로부터 처음 보면 의미를 알기 힘든 노래와 환상향의 한 장면,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떤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차되는 행간을 건너뛰며 읽고, 한 시점을 파악한 다음에는 다시 돌아와서 두 번째 시점을 건너뛰며 읽어야 합니다.
1.1.1) 여느 몽타주가 그렇듯 이어붙여서 뒤섞이는 자체로 새 의미가 창출되는 건 덤이죠. 분리한 시점 1과 2는 별개의 텍스트로도 기능하지만 합치면 더 큰 의미의 심상을 창출하게 됩니다.
<시점 1,2 분리>
바구닐, 참한 바구닐 들고 - 시점 1 #1
호미를, 참한 호미를 들고 - 시점 1 #2
소녀는 흐드러진 피안화 사이를 걷는다. - 시점 2 #1
바람에 피안화가 파도소리를 내며 흔들려 소녀의 손을 간질인다. - 시점 2 #2
<시점 1,2 병합>
바구닐, 참한 바구닐 들고 - 시점 1 #1
소녀는 흐드러진 피안화 사이를 걷는다. - 시점 2 #1
호미를, 참한 호미를 들고 - 시점 1 #2
바람에 피안화가 파도소리를 내며 흔들려 소녀의 손을 간질인다. - 시점 2 #2
같은 논리로 시점 1,3의 병합도 새로운 청각적 심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바다를 향해 출범했고...”] - 시점 1 #1
바람에 피안화가 파도소리를 내며 흔들려 소녀의 손을 간질인다. - 시점 2 #2
하지만 시점 1, 2, 3은 완전히 동등하지 않습니다. 시점 1과 3은 작가가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는 인용구이기 때문에 각 시점을 매끄럽게 연결하기 위해서는 시점 2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죠. 즉 고대 일본의 시점 1, 현대 미국의 시점 3이 환상향의 시점 2로 인해서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실제로 3)에서 가려진 인용구의 본모습을 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두 상반된 시공간이 환상향에서 연결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해당 장면의 모호성을 더 걷어내고 싶으신 분은 3.1)로 점프를 부탁드립니다.
1.2) 몽타주의 조금 더 강력한 예시라고 한다면 같은 시점을 중심으로 한 공간 몽타주입니다. 줄거리상으로 타케히코는 월면 탐사의 보복을 위해서 역사를 뒤흔들고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조장하기에(주장하기에. 왜 굳이 이렇게 썼는지는 본문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릅니다) 이르는데, 이때 쓰였던(혹은 쓰이지 않았던) 봉래의 옥가지를 놓고 에이린과 대화하다 역습을 받는 장면에서 비슷한 기법이 쓰였습니다.

본문에서 세로선으로 나뉜 좌우는 각각 타케히코의 의식과 사고를 분리해서 다른 공간적 배경에 놓고 있습니다. 때문에 밑에서 서술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두 사건을 동시에 읽고 있다는 느낌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2.1) 의도적인 모호함은 중첩이라는 테마 위에서 가중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이 원문 그대로 실은 본문의 문장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달의 도시(의 주인(의 궁전))(의 의식)[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괄호의 중첩을 통해서 여섯 가지 경우의 수를 마주치게 됩니다.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 요동치는 주어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비선형적인 연출의 한 가지 예시입니다. 도시가 요동치고 있을 수도 있고, 도시의 주인인 츠쿠요미의 의식이 요동쳤을 수도 있습니다.
‘에이린은 헛된 {후회/공상/자기연민}의 중첩을 사고 중에서 분리하여 의식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 p265
더 앞에서 소개되는 중첩은 에이린의 복잡한 감정과 사고의 입체성을 부각시킵니다.
‘그 날(달)의 재상이 나아가 절을 한 뒤 그 조서를 들고 일어나서 읽었다.’ - p273
달의 도시의 밤낮은 달의 공전으로 정해진다는, 오묘한 위트도 덤입니다.
2.2) 소설 속 텍스트적 연출은 앞서 1.2)의 사례에 머물지 않고 등장인물의 의식에 맞춰서 변화합니다. 처음 봤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밑의 구절은 ‘차라리 폭력적일 정도로’란 작중의 설명이 적절하겠군요. 정말이지 폭력적으로 신기한 연출이었습니다.

3.1) 그렇다면... 인용구를 설명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일이 설명하자면 끝이 없지만, 이에 대해선 앞서 1.1.1) 에서 분석한 내용에 살을 붙여보겠습니다. 인트로의 시점 1은 <만엽집>에 수록된 천황의 노래(天皇の御製歌), 시점 2는 작가가 직접 집필한 구절, 시점 3은 1962년 9월 12일에 케네디 대통령이 대학에서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라고 연설한 내용입니다.
우선 <만엽집>에서 천황의 노래(天皇の御製歌)는 4,516수의 맨 처음을 맡는 곡입니다(『<만엽집> 읽기』, p12).
https://www.youtube.com/watch?v=1NA9yUxLJIY
바구니를, 참한 바구니를 들고
호미를, 참한 호미를 들고
이 언덕에서 풀 캐는 아이
집안은 어디고, 이름은 무엇인가
하늘 밑의 야마토, 란 나라는
모두 통틀어, 내가 다스리니,
그 전부를 다, 내가 지배하니
나에게만 말해주련,
집안도 그 이름도.
籠もよ み籠持ち 掘串もよ
み掘串持ち この岳に
菜摘ます子 家告らせ
名告らさね そらみつ
大和の國は おしなべて
われこそ居れ しきなべて
われこそ座せ われこそは
告らめ 家をも名をも
제목이나 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노래는 구혼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5세기 무렵 일본의 풍속에서는 초봄에 어린 풀이 자라났을 때 바구니와 호미를 들고 들판에 나서곤 했다고 하네요. 이때 화자는 자신이 야마토(大和)를 다스리는 군주임을 밝히며 소녀에게 집안과 이름을 묻고 있습니다. 과거의 풍속을 생각하면 사실상의 구혼인 셈이죠.
또한 시점 3에 해당하는 케네디의 유명한 연설은 후기에서 밝히는 바처럼 아폴로 계획에 대한 지지를 끌어모으기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만엽집>, 즉 일본적 시풍의 시작과 아폴로 계획의 시작이 합쳐지면서 두 시점 모두가 소설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연출상 일부러 숨기셨겠지만, 작품의 시작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의의를 두는 데 만족해야겠군요.
0.1) 위에서 설명된 나머지 갈래를 다 훑어보셨다면 왜 이 소설에 제가 붙인 별명이 양자 중첩 소설인지가 와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1) 의 갈래에서 설명한 몽타주, 2) 연출과 함께 제시되는 의도적 모호함, 3) 어디까지나 흥미로운 배경으로 기능하는 인용구처럼 독자가 처음에 파악하지 못할 요소가 산더미로 남아있습니다.
의외라는 생각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메인 스토리라인만을 따라가 보자면 A) 달의 도시가 위협을 느끼고 B) 와타츠키 자매와 타케히코가 대립하며 C) 잘못된 수단을 잘못되게 쓴 타케히코가 에이린에게 역습당하는 구성입니다.
요약만 보자면 이해하기 크게 어렵지 않으나 암투가 해소되는 과정은 난해합니다. 주연인 에이린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기보단 반동인물인 타케히코와의 상호작용으로 밝혀지는 구성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작가의 선택이자 의도는 이번에도 중첩입니다. 와타츠키 자매의 관측이란 형태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중첩이 파괴되는 장면은 작품이 은연중에 지닌 양자역학이라는 테마를 표현하기에 적격인 듯합니다. 역습이 개시된 정황조차 카나코의 재료공학적 지식이 가미되어 있지 않던가요.
여기서 추가하자면 본작 <History and the Bullet in the air>는 가장 많은 음모론이 중첩되어 존재하는 케네디 암살의 배후로 달의 도시를 애매하게 지목하고 있습니다. 타케히코의 '흑막의 흑막의 흑막' 같은 더욱이 애매모호한 말을 걷어내고 보면 달은 그저 배후일 뿐입니다. 실질적인 역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고고하게 지구를 돌고 있죠. 사실만 놓고 보면 케네디가 암살되었으나 달 탐사는 진행되었고 월인들은 그저 흑막인데 만족했다는 결말이지 않던가요(타케히코를 쓰러트린 건 케네디와 관련없는 이름없는 이들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보고 나면 난해한 표현과 연출, 설명 없는 인용구의 폭격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음모론의 모호함 자체를 소재로 다루기 위함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로 이 소설에 두 줄로 된 단평을 남기자면 이렇습니다.
이 소설은 난해하지 않다(하지만 역시 난해하다).
연출(과 내용(과 인용구))에 대한 작가의 집념이 좋은 쪽으로 강하게 표출되었을 뿐이다.
레퍼런스
たのしい万葉集(0001): 籠もよみ籠持ち掘串もよこの岳に. (n.d.). https://art-tags.net/manyo/one/m0001.html
강용자, 『<만엽집> 읽기』,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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