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뛰어넘어 20세기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아름다운 빈티지 카메라의 소개영상을 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lgG95zP8dQ

짧은 영상을 보셨다면 소설의 표지에 실린 아야의 카메라를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코닥 브라우니 플래시 II~III형. 줄무늬의 색상으로 보면 IV형을 개조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야심찬 분석은 1957년이라는 출시 연도 앞에서 빗나가고 맙니다. 아무래도 지엽적인 퍼즐 맞추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어야 할 것 같군요.

1. 카메라 1개 1달러의 가격이 만든 변화
소설의 내용과 연관지었을 때 훨씬 중요한 점은 이렇습니다. 카메라가 20세기 무렵에 대중화되었다는 것. 19세기 중후반의 카메라는 유리판과 암실 등등의 많은 준비물과 시간을 요구하는 번거로운 도구였지만,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이 이스트만 코닥사(社)를 세우며 상황은 천천히 바뀌었습니다.
이스트만 코닥의 가장 큰 발명품은 바로 어디에서나 간편한 사진촬영이 가능한 필름 카메라였습니다. 대량 생산을 통해 1달러에 판매되는 카메라와 필름 사진을 통한 순간 포착. 이 또한 역사의 순간이 초상화풍의 정적인 인상에서 대중친화적이고 동적인 순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코닥 사의 모델이 종종 파란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메구무에게 모델 이야기를 하는 아야의 대사도 소소한 재미입니다.)
작중의 환상향에서도 사진기의 등장으로 기존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새로운 장면들이 역사의 일부가 됩니다. 대텐구의 권위가 흔들리는 순간. 마을의 사람들이 총을 들고 요괴 퇴치를 모의하던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고, 고로 그림으로 그릴 가치는 딱히 없었던 일상의 순간. 피난길에 오른 요괴가 마차에서 지쳐버린 순간.
카메라의 등장으로 역사의 순간에 질적으로 다른 생동감이 불어넣어졌습니다. 메구무의 말처럼 ‘그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동감입니다. 메구무는 한술 더 떠서 이 사진들로 신문을 만들자고 아야에게 제안하고 있습니다.
“환상향 최초의 사진 신문이 될 거야. 사람들은 분명 열광할 거다.”
- 이즈나마루 메구무, p478 <나는 기자로소이다>
대사에서 행간에 감춰진 요소를 읽을 필요가 있군요. ‘사람들’이란 물론 대중(mass)를 의미합니다. 사진과 신문을 둘 다 포괄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바로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media)입니다. 즉 메구무의 대사는 사진술의 발전으로 환상향 최초의 대중매체(mass media)가 등장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2. 신문의 등장과 커뮤니케이션학
신문이란 개념은 의외로 먼 과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월버 슈람 저 <언론학의 기원>에 따르자면 ‘법적으로 승인받은 발행인이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신문’이 이미 17세기 초반 유럽에서 존재했고, 비록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초기 언론의 자유를 논의하는 데는 충분한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경직된 사회의 분위기를 통탄했던 목소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케이스는 <실낙원>의 저자 존 밀턴이 1644년에 쓴 <아레오파지티카>입니다.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해야 한다. 이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코 없다.” - 존 밀턴, <아레오파지티카>
대중매체에 닳고 닳은 현대인으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단정적인 선언입니다. 아마 이런 의문이 드실지도 모르겠군요. 자유로운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이 결코 없다니, 밀턴은 선전이나 선동에 걸려본 적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말한다고.
밀턴의 자유 찬양에 대해 있을 법한 반박으로 대중매체가 다시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선전, 선동, 프로파간다와 같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요소는 이미 차고 넘쳐납니다. 작중에서도 ‘좋을 대로 써제끼는 프로파간다’라고 아야의 신문을 낮게 평가하는 등장인물이 있지요.
작가 후기에서 러일 전쟁과 승전의 흥분에 취한 대중들을 논하는 구성은 이런 우려점을 가중시킵니다. ‘결국’ 이런 선전선동은 역사의 광기와 맞물려서 1945년의 비극을 낳지 않았던가요? 인간 마을과 요괴의 산도 결국 대중매체가 파국으로 몰아갈 것인가? 대중신문을 만들겠다는 권력자, 메구무의 생각은 과연 마키아벨리적 음모인가?
정작 이런 생각을 품었다면 작품을 읽어내리다가 “어? 해피엔딩이네?”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흥미로운 상황은 앞서 언급한 <언론학의 기원>에서 슈람이 커뮤니케이션학의 4대 시조로 언급하는 해럴드 D.라스웰이 의도한 대로입니다.

라스웰이 선전에 대해 무엇을 통찰했는지 알아보기 전에, 우선 그가 개념화한 커뮤니케이션의 사회 및 정치적 기능을 인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월버 슈람, 『언론학의 기원』, p69).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대중매체를 통한 소통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언론정보학(communication sciences)이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란 용어가 더 친숙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는 1948년 <사회 내 커뮤니케이션의 구조와 기능 The Structure and Function of Communication in Society>이라는 논문에서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죠.

소설 속의 구체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을 이해해 봅시다.
첫 번째, 아야가 신문에 실었던 사람들의 퇴치 모의는 텐구 사회 안에서 경계해 마땅하다는 의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첫 번째 기능인 환경 감시입니다.
요괴를 적대하는 세력의 출현은 텐구 사회에서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라는 의제를 불러일으켰고, 이에 이어지는 이면의 논쟁과 토론은 두 번째 기능, 관계 설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요괴의 산에 도전하는 모든 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라는 대자보는 관계 설정의 결과이자 일종의 선전입니다.
사람마다 약간 다르게 볼 여지가 있지만, 작중에서 전운이 감도는 환상향을 감지하고 대화를 나누는 하타테와 아야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영향을 절감하고 새 시대에 걸맞는 언론인의 모습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마지막 기능, 사회화입니다. 또한 사회화를 통해 무력했던 아야는 해피 엔딩에 다다를 의지를 얻게 되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텐구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1: 아야의 환경 감시에 따른 논쟁이 불거지다
2: 논쟁의 결과 관계 설정이 이루어지고 대자보를 통해 내부를 단속하다
3: 아야와 하타테의 대화의 결과로 새 사회상에 걸맞는 사회화가 진행되다
4: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을 자각한 아야가 새 정보를 생산, 선전하다
5: 정보를 전달받은 하쿠레이의 무녀가 갈등의 폭발을 억제하다
6: 메구무가 젠키보오에게 폭력이 아닌 매체의 힘으로 통치하자고 제안하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대중매체의 힘을 처음부터 인지하고 계획을 세운 메구무의 혜안이 돋보이는군요. <아레오파지티카>의 존 밀턴이 개탄한 현실은 이렇게 갈등을 봉합할 요소 하나 없이 폭력과 억압으로만 사회를 통제했던 시대였습니다. 이처럼 만약 아야의 신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소통하지 않으면 결말은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방식밖에 없습니다. 인간 마을에서는 무장한 사람들을 내보냈겠고, 꼼짝없이 전쟁을 치르느라 삶이 황폐해졌겠죠. 마무리를 짓는 메구무의 제안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힘을 키워야 합니다... 카메라와 신문을 유행시켜 환상향의 모든 정보를 통제할 겁니다. 혼란이 아니라 질서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강함입니다.” - p496, <나는 기자로소이다>
3. 후기
여기서부턴 사견과 개인적 감상이 합쳐져 있습니다. 아야의 사진이 담긴 대중매체는 갈등을 확산시키고 창출했지만, 각지에서 일어난 갈등을 봉합한 것 역시 대중매체입니다. 작품에 관해 라스웰의 어록 중에서 어울리는 인용구는 이렇게 되겠군요.
“선전은 삶에서 불가피한 사실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선전에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적응해야 한다.” (Lasswell, 1927/1971, pp.222~223).
라스웰의 주장은 선전의 부정적인 특성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전시에 선전을 동원한 것은 추축국뿐만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택한 연합국도 있다. 오히려 연합국이 선전을 더 잘 활용했다. 그렇다면 모든 선전은 과연 악의 산물인가?’ 이게 라스웰이 마키아벨리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받을지언정 대중매체와 선전의 긍정적 요소를 싣길 멈추지 않은 이유입니다.
곧잘 만악의 근원이라고 묘사되던 붕붕마루 신문이 이렇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소설을 보니 신선하고 재미있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언론 예찬만 실린 것이 아니라서 메구무가 마키아벨리처럼 이 모든 걸 계획했는지, 아니면 라스웰적 사고방식에 의거해서 폭력을 종결시켰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서사의 발단도 알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결계가 잠깐 느슨해진 사이 들어온 사진기의 발명. 편안히 읽되, 생각하자면 얼마던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 좋은 단편이었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이만 마무리하고 다음 리뷰로 찾아오겠습니다. 이 시대의 (정말로) 드문 참언론인 아야를 그려주신 작가님께 박수를 보내며, 다음 편은 38계, 1923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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