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어로 1년만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역사를 소재로 한 이번 동인지, 거의 550페이지에 달하는 만큼 정말 기대되는데요. 이번에는 심혈을 기울일 겸 저번의 경험을 살짝 비틀어서 일부러 역순으로 가겠습니다.
그럼 1885년, <shanghai>부터 시작입니다!

상하이, 동방 팬덤에서 이 도시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동방 프로젝트의 원작자 ZUN은 ‘상하이 앨리스 환악단’을 세웠고, 구작에서 신작으로 넘어올 때 발매된 앨범 <봉래인형>은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 전쟁이 발발한 1884년을 가리켜 ‘메이지 17년의 상하이 앨리스’란 곡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단편, <shanghai>의 주인공 또한 앨리스죠. 여기서 잠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상하이인가? 앨리스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해답은 2004년 10월 30일에 진행된 메이지대학 초청 강연 <동방의 새벽>에서 찾아볼 수 있죠. 해당 인터뷰에서 진행된 Q/A를 발췌해서 실어보겠습니다.
Q: ‘상하이’와 ‘앨리스’라는 동서양을 이미지 시키는 단어를 조합한 써클명으로 한 것은 어떠한 의도입니까?
A : 일본식과 서양식의 절충이 기본에 깔려 있습니다. 제 안의 상하이는 서양의 문화와 동양의 문화가 뒤섞인 도시의 이미지였기에, 상하이를 넣어 봤습니다. 도쿄에 없어도 회사명에 도쿄를 집어넣는 것과 같지요.
앨리스는 뭘까요? 조계에 살던 아이일까요? 하지만 그보다 옛날이야기의 이미지가 강하지요 앨리스는. 상하이앨리스에는 동양과 서양과 환상, 그러한 의미를 익히 알고 있는 단어로 나타내 봤습니다.
즉 원작에서 상하이란 익숙한 동서양의 풍경이 서로 맞물리는 장소, 즉 두 세상의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작중의 앨리스는 두 문명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민 1.5세대로 등장합니다. 본 작품은 이때 상세한 자료조사를 기반으로 앨리스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이었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회의 전통이 강하게 숨쉬는 동유럽 출신의 소수 이민자 그룹에게는 자녀를 믿고 맡길 교육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 p506, <shanghai>에서
건조한 사실의 나열을 가장한 문체는 여기서 두드러집니다. 작가 후기에서 나오듯 90%가 실제 역사에 기반한다면 나머지 10%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바로 작가의 상상력과 서사에서 오고 있습니다. 마치 망원경으로 전체적인 풍경(거시사)을 보여준 다음에 이 속에서 살아가는 가상의 개인(미시사)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식이죠.

이런 현미경과 망원경의 전환을 자유롭게 해주는 요소는 각 캐릭터가 두 초점의 역사 속에서 맡은 역할과 작중의 서술입니다. 그러면 총 3명의 캐릭터가 상징하는 역할을 정리해볼까요?

거시사와 미시사의 언어로 줄거리를 각각 요약해 보겠습니다. 분명 같은 내용이지만 단어를 바꾸는 것만으로 분위기가 굉장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시사(집단 서사): 동유럽계 이민 1.5세인 소녀는 언어의 장벽에 갇힌 이방인이었다. 소녀는 시대에 뒤쳐진 지식인의 도움으로 조계지에 흐르는 수많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를 찾으러 홍차관에 들어갔다가 일본계 급진파 혁명가들 사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미시사(개인 서사): 앨리스 마가트로이드는 언어의 장벽에 갇힌 이방인이었다. 앨리스는 신키라는 마법사의 도움으로 조계지에 흐르는 수많은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신키를 찾으러 홍차관에 들어갔다가 정체를 숨긴 요괴와 혁명가들 사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또한 이 두 표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거시사로 나타낸 위의 문단을 ‘더 거시적으로’ 나타내는 것 또한 당연히 가능합니다. 망원경의 비유를 다시 들고 오자면 ‘초점을 더 멀리 당기는’ 행위인 것이죠.
거시사(집단 서사 2): 급진파 혁명가들이 자기 말을 알아듣는 동유럽계 이민 1.5세를 위협했다.
거시사(집단 서사 3): 메이지 17년의 상하이 조계지는 인종, 국적, 사상의 갈등이 다분한 불안한 도시였다.
작가 후기에서 인용할 수 있는 거시사의 단편은 이렇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1884년의 상하이는 미화하래야 미화할 수 없는, 누구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공간으로 비춰졌습니다.’ -p548
작품이 집필되는 과정, 즉 어떤 가상의 미시사를 형성하는 과정도 바로 다음 줄에 나와 있군요.
‘앨리스 같은 소녀는 상하이에서 정말 위태로운 일상을 보냈을 것 같아요.’ -p548
그렇다면 이번에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현미경 속 ‘앨리스’라는 소녀의 여정을 따라서 작품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앨리스라는 개인의 위태로운 일상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요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언어를 모르는 것과 언어를 아는 것 양쪽이죠.
작중에서 유이하게 비현실적인 요소인 신키의 인형은 이 두 상태(무지와 지)를 뒤집어놓습니다. 그래서 앨리스의 일상이 회복되는가?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키와의 만남으로 알게 되는 사실은 오히려 앨리스의 일상을 이전보다 더 크게 뒤흔듭니다. 개인이 변해도 역사 속의 불안한 상하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오히려 아는 게 더 큰 죄일까요? 작품의 클라이막스이자 피날레에선 앨리스의 부모님이 떳떳하지 못한 무역으로 만든 아편굴에서 분노한 혁명가들에게 둘러싸이는 아이러니가 돋보입니다. ‘우리 땅에서 나가라! 정직한 자를 죽여라! 비정직한 자도 죽여라!’ 라는 대사들은 문자 그대로 놓고 보면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앨리스에게서 어떠한 마법을 눈치채는 인물은 마법사와 함께 잊힌 요괴, 산뇨입니다. 아까 작중에서 유이하게 비현실적인 요소 중 하나는 신키의 인형이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산뇨가 내뿜은 아편 연기의 영향일지, 관내에 가득한 아편쟁이들은 다함께 소녀가 이렇게 부르짖는 모습을 보게 되죠.
와레와 코아노 하타노 모토 호라이니 멧시호코센토!
(我ハ興亞ノ旗ノモト蓬莱ニ滅私奉公セント!)
‘나는 흥아의 깃발 아래 봉래에 멸사봉공이라고!’ 이게 어느 세상의 동유럽 소녀가 할 말이랍니까? 하지만 아편과 상하이의 광기는 소녀의 운명을 미지로 남겨놓습니다. 처음에 나온 제목 <shanghai>에서 s가 소문자인 것을 눈치채셨나요?(저는 못 알아차렸습니다) 작중에서 친절히 사전상의 의미를 실어준 덕에 우리는 앨리스의 운명을 몇 가지로 좁힐 수 있습니다.
shang·hai 1
타동사
1. [속어] (선원으로 만들기 위해) 마약 혹은 술로 의식을 잃게 한 다음 배로 끌어들이다. 유괴하다.
2. [속어] (어떤 일을) 속여서 하게 하다. 강제로 시키다.
- p530, <shanghai>의 각주에서

이것이 아편에 찌든 도시 속 소녀, 메이지 17년의 상하이 앨리스를 회고하는 말들입니다. 거시사와 미시사 양면에서 다각도로 조망된 광기를 보는 느낌, 두 가지의 초점을 넘나들면서 각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녹여낸 이번의 멋진 단편이었습니다.
이쯤에서 역사소설에 대해 가진 개인적인 견해를 하나 짚고 넘어갈 차례가 되었군요. 역사란 필연적으로 집단의 행동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국가나 도시, 집단, 사상, 종교도 역사소설에선 각자에게 할당된 서사를 가집니다. 거시사와 미시사의 각 단계마다 더 광범위한 사건은 배경이 되고, 더 구체화된 사건은 일종의 캐릭터가 되는 셈이죠.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1884년의 상하이는 미화하래야 미화할 수 없는 캐릭터성을 지녔습니다. 이곳에선 소녀가 아무런 도움이나 교육 없이 아편굴을 쏘다닐 수 있고, 혁명가란 사람들은 현실에 절망해서 아편을 피워대며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떠드는 식입니다.

상하이란 도시를 이렇게 만든 손길은 당시 열강을 포함한 외세(영국, 프랑스, 일본 등등)에서 왔습니다. 이들은 작중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더 큰 거시사의 주인공이자 ‘배경들의 배경’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영속할 것만 같은 배경조차 곧이어 찾아올 더 거대한 흐름, 역사 앞에서는 미시적일 뿐입니다. 또한 이로 인해 환기되는 것은 <환상향 역사특별전>이라는 책의 마무리로 손색이 없는 본편의 구성이죠.
일부러 시간순으로(책 구성과는 역순) 찾아갈 나머지 9개의 단편을 위해 잠시 말을 아끼겠습니다. 책의 마무리에 실린 소위 양귀자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인용하지 않을 수 없군요. 언제나처럼 작가님께 감사를 표하며, 그럼 이만 다음 리뷰에서 찾아뵙겠습니다.
“상하이! 아아, 찬란한 상하이!”
레퍼런스:
Microhistory and macrohistory | The Network State. (n.d.). thenetworkstate.com. https://thenetworkstate.com/microhistory-and-macrohistory
ZUN/강연 | 메이지대학 ZUN 초청 토크 .. : 네이버블로그. (n.d.). https://blog.naver.com/killerleader/90032173350
기여자위. 프. (2023, August 30). 상하이 조계. https://ko.wikipedia.org/wiki/%EC%83%81%ED%95%98%EC%9D%B4_%EC%A1%B0%EA%B3%84#/media/%ED%8C%8C%EC%9D%BC:Shanghai_19th_century.jpg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68계, 1953년: <나를 찍지 말아줘> (1) | 2025.02.27 |
|---|---|
| 60계, 1945년: <구상천> (0) | 2025.02.24 |
| 38계, 1923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0) | 2025.02.20 |
| 20계, 1905년: <나는 기자로소이다> (1) | 2025.02.17 |
| 토오레키시 ~ 환상향 역사특별전을 읽고 (0) | 2025.02.17 |